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베르사유 조약 (문단 편집) == 사후 수습 - 배상금 경감 == 독일은 결코 협상국이 요구한 배상금을 감당할 수 없었다. 라인란트 비무장화, 독일 대양함대 요구, 메멜과 폴란드 회랑의 동부영토 상실은 독일 국민들의 엄청난 분노를 일으켰고 베르사유 조약과 1차 세계 대전 휴전 협정에 서명한 독일 대표단은 11월의 배반자들이라는 멸칭이 붙으며 매국노라는 비난을 들었다. 또한 전후 혼란을 틈타 독일의 공산주의 세력인 스파르타쿠스단이 1월 봉기를 일으키며 사회를 더더욱 극도의 혼란으로 몰아넣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도 바이마르 공화국은 최대한 배상금을 갚으려 했지만 경제는 날로 악화되어 1922년 말 디폴트 선언을 하기에 이른다. 여기에 분노한 '''벨기에와 프랑스는 군대를 동원해 독일의 최대 공업지대 루르 지방을 강제 점령'''하였고 프랑스와 벨기에의 이런 행동은 독일인들을 더더욱 자극해 급격히 극좌우 세력들과 [[배후중상설]]이 자라는 치명적인 결과를 불러일으켰다. 독일 내부 공산당 세력과 극우 세력이 자라기 시작하자 독일 내 공산당 세력이 커지는 것을 경계한 [[미국]]이 나서서 대규모 재건 계획을 시행하면서 베르사유 조약에 조인한 바이마르 공화국을 달랬고, 후에 [[캘빈 쿨리지]] 정권에 이르러서는 '[[도스 안]](Dawes Plan)'이라는 것을 내놓아 독일의 배상금을 경감시켜주기도 하였다. 미국이 어느 정도 자비를 베푼 것이었다. [[1921년]] 4월 27일 런던에서 배상금을 66억 파운드(= 320억 달러 = '''1,320억 마르크''')[* 이 금액은 1921년 초의 전쟁 배상(10억 마르크 + 수출액의 1/4인 3억 마르크 = 13억 마르크)으로 빚어진 [[인플레이션]]에 의해 달러 - 마르크화 환율이 급등하던 시절의 것이다. 환율은 전쟁 전 1달러당 4마르크 대, 전쟁 중 9마르크이던 게 전후 47마르크를 거쳐 1921년 연말에는 1달러당 330 마르크로 올라버렸고, 기어이 [[1922년]] 말에는 [[초인플레이션]]으로 달러당 8,000마르크가 되었다. 그래서 골트마르크로 환산하면 2,690억 마르크가 되고, 대략 10만 톤의 순금과 맞먹게 된다.]로 확정하고, [[1924년]] 도스 안과 [[1929년]] '[[영 안]](Young Plan)'을 통해 조정되었다.[* 총액으론 도스 안보다 13% 탕감되고 59년 할부로 바뀌었다. 하지만 독일에서는 "59년 동안 빚 갚으면서 노예질 하라고?"라는 반응으로 안 그래도 인기 없던 바이마르 공화국 정부는 나노 단위로 까였다. 아돌프 히틀러도 이걸 두고두고 이용해먹었다.] 그 내용은 [[바이마르 공화국]]의 경제 상황을 고려하여 8억 마르크의 차관을 빌려주고 순차적으로 첫해 10억 마르크에서 시작해 매해 20억 ~ 25억 마르크(= 4.73억 달러) 전후한 금액을 59년간 갚도록 책정했다(이렇게 하면 1,210억 마르크가 된다). 바이마르 공화국은 실제적으로는 매해 10억 마르크대를 납부했고 이를 제안한 찰스 도스(Charles Dawes)는 [[노벨평화상]]을 수상한다. 그리고 이즈음 바이마르 공화국이 [[국제연맹]]에 복귀한다. 하지만 이런 노력에도 불구하고 가장 [[독일]]에 적대적이었던 프랑스의 반대[* 단 프랑스의 탓만 하기는 어렵다. 수십 년 간 이어진 독일과의 적대관계로 인해 프랑스 내부의 반독 감정은 엄청난 수준이었고, 더욱이 끔찍한 참호전으로 반독감정이 극대화된 젊은 세대는 1920~1930년대로 넘어가면 3040세대, 즉 핵심 유권자이자 오피니언 리더에 해당하는 연배가 되었다. 결정적으로 1차대전 서부 전선 대다수 전투는 프랑스 땅에서 벌어졌다. 프랑스 정치인들이 함부로 대독 유화책을 주장했다가는 '''목이 남아나기 어려웠다.''']로 매번 절충안들이 적시를 놓치거나 배상금 조정폭이 대폭 줄어들곤 했다. 결국 외화유출이 지속되고, 독일 중앙은행이 이에 화폐 찍어내기로 대응하면서 아직 초인플레이션 단계까지는 아니지만 꽤나 급격한 폭의 인플레이션은 피할 수 없었다. 독일 경제 붕괴를 막기 위한 영미의 절충안 제시 → 프랑스 반대 → 지속적인 물가 상승과 국민 경제 불안정 → 독일 경제 붕괴를 막기 위한 영미의 절충안 제시 → 프랑스 반대 이런 악순환이 반복되며 [[배후중상설]]과 반프랑스 감정이 확산되는 등 여러모로 사회 분위기가 아슬아슬했는데 '''[[대공황|결정타]]가 터졌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